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다
사실 남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것,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.
생존의 양식이 겨우 남의 말을 들어 주는것 뿐이라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.
그러나 가면 갈 수록 경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,
남의 얘기를 들으며 두 눈을 마주보고 고개를끄덕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,
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도대체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을
결국 남의 일로 치부 해버리고 마는 일이
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절감하게 됩니다.
돌아 보건데, 나는 경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.
그저 남의 얘기를 들어 주며 미소를 짓거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면서
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경청이 아닙니다.
경청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지만,
그것은 제대로 들은 뒤 나의 견해를 말하고 상대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로까지
이어져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.
그렇지 않은 경청은 기만입니다.
남의 일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대화는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 아니겠는지요.
생각이 좀 다르거나 달라보이면 어느새 들어주는 척했을 뿐입니다.
내 마음 속에 정해놓은 틀 밖의 얘기라면 두 귀를 틀어 막곤 했습니다.
다만 겉으로는 예의라는 허울을 쓰고 웃으면서도
속으로는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지, 하면서 낮추어 봤지요.
사실이 이러하니 '경(敬)'은 커녕 '청(聽)'도 잘 몰랐던 것입니다.
말하자면 온전히 한 사람을 이해하거나
사랑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며 살아 온 것이지요.
사실은 나 또한 그들에게 똑 같이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체 말입니다.
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요.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한 체
알량한 지식과 지혜로 그를 깨우치거나 설득하려 들었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요.
아무리 틀린 말이라 할지라도 깊이 새겨 듣지 않고
성급히 내뱉은 말, 이를 어찌 주워 담을 수 있을까요.
그래서 옛사람들은 '입은 곧 화가 들어오는 문(구시화문 口是禍門)'이라고 했습니다.
그렇다면 두 귀는 곧 복이 들어오는 문이 아닌지요.
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고 있었으니
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지요.
수시로 두 귀로 파고드는 온갖 진리의 말씀마저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,
어찌 소리를 보는 관음(觀音)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.
세상을 휘휘 둘러보노라면,
정치판이든 운동판이든 도대체 귀는 보이지 않고 나팔 같은 입들만 둥둥 떠 다닙니다.
나 뿐만이아니라 모두가 허풍선이니,
그러다 터지면 어찌 할까요.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
세상을 바꾸는 힘은 달변이 아니라 경청입니다.
삶의 아름다운 해답이 바로 경청의 자세이니
이 경청의 자세야말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초석입니다.
그리하여 다시 입은 하나요, 귀는 둘입니다.
<이원규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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